운전 중 숨진 화물 지입차주가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상태에서 일했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자신 소유의 화물차를 이용하며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더라도 회사의 지휘·감독이 있었다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이 보호하는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2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9-1부(재판장 강문경 부장판사)는 최근 식자재 배송기사 A씨의 어머니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운송용역계약 맺고 배송
1심 “고정급 없고 근로소득세 안 내”
A씨는 2017년 1월 경기 하남의 한 식자재 납품업체와 운송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식자재를 배송해 왔다. 그러다 이듬해 10월 화물차를 운전하던 중 가슴 통증을 호소하고 쓰러졌다. 즉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지고 말았다.
A씨 어머니는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가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지만, 공단은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했다. 계약 형식과 상당한 지휘·감독 여부 등을 볼 때 A씨가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A씨 어머니는 2020년 2월 소송을 냈다.
재판의 쟁점은 A씨가 산재보험법이 정한 근로자에 해당하는지였다. 회사와 체결한 계약서를 보면 A씨는 1년 단위로 계약하면서 월 280여만원의 운송료를 받았다. A씨는 4대 보험과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회사는 물류운송비에서 사업소득세를 제외한 금액을 지급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도착지를 명시하고, 운송에 필요한 부대작업도 지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 A씨는 주 5일을 근무하면서 매일 오전 2시께 시장에 도착해 물품을 수거한 뒤 식자재를 싣고 배송지로 출발해 늦어도 오전 8시30분까지는 배송을 완료했다. 물품에 하자가 있거나 수량이 부족하면 인근 마트에서 물건을 추가로 구입해 납품하는 일도 잦았다.
1심은 A씨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고정 급여가 없다는 점이 핵심 근거가 됐다. 회사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지 않고,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부분도 유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A씨가 별도의 업무일지를 작성하지 않았고, 배송 완료 이후 업무수행 방식에 회사가 제한을 가한 부분이 없다고 봤다. 근무시간과 장소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A씨가 다른 업체의 물품을 배송한 점도 유족의 발목을 잡았다.
2심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임금받으며 반복적 업무 수행”
그러나 항소심은 1심을 뒤집고 A씨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봤다. 회사의 핵심 업무가 배송이라는 판단에 따른 결론이다. 재판부는 △배송인력이 상시 필요한 점 △정해진 시간에 신선한 식자재를 배송해야 하는 업무의 특성 △거래처와의 지속적인 거래 유지 필요성 등을 볼 때 회사의 상당한 지휘·감독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A씨가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됐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망인은 정해진 배송경로를 따라 매일 단순·반복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며 “회사는 업무 수행 결과를 평가하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회사의 보수가 A씨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는 점도 근거로 삼았다.
이와 함께 회사가 유류비와 통행료를 부담해 A씨가 독립적으로 사업을 영위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유사한 형태로 일한 다른 직원과 마찬가지로 A씨 보수의 성격도 임금이라고 판단했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형식상 지입차주계약을 맺었더라도 실질적으로 근로자라는 징표를 가지고 있다면 산재보험을 수급할 수 있다고 판단한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