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노동자’인 적 없던 가사노동자 가사노동자 관련법 또 폐기 눈앞, 21대 국회는 다를까
| | ▲ 2017년 6월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한국YWCA연합회와 한국가사노동자협회 소속 가사노동자들이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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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에서 19년째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A(57)씨는 무시와 하대를 일삼는 고객들을 만나도 자부심을 놓은 적이 없다. A씨를 딸 집에 갈 때마다 끌고 간 고령의 여성 고객을 만났을 때도 “오래 일한 나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동료가 맡는다면 얼마나 힘들겠냐”는 생각으로 참았다. 예상치 못한 노동강도에 두세 달 만에 그만두는 동료들 속에서 그렇게 20년 가까이 버텼다. 하지만 육체적·정신적으로 고된 노동을 견뎌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A씨는 “맨날 (국회에서) 논의만 하고 바뀌는 건 없다”며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단 하루만이라도 가사 일을 직접 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A씨처럼 대가를 받고 청소·세탁·육아 같은 가사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사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 이후 단 한 번도 ‘노동자’인 적이 없었다. 근로기준법 11조에 “이 법은 가사(家事)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나 4대 사회보험은 물론이고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퇴직급여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등도 적용받지 못한다.
가사노동자는 공식 통계로 집계되지 않아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용노동부는 2017년 가사노동자수를 25만명 정도로 추정했다. 법 테두리 바깥에 있는 약 25만명의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로 인정받으려면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다. 18·19대 이어 20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되고 재발의되는 과정만 반복했다.
18·19대 이어 20대 국회서도 폐기 21대 ‘1호 법안’ 될까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0년 18대 국회에서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법 적용범위(11조)에서 가사 사용인 제외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이후 시행령 개정을 통해 근로기준법의 일부 규정만 적용받도록 했다. 이 법안은 논의 진전 없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11년 6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시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이 “인권이라든지 보호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면서도 “여건의 성숙, 이런 상황을 봐야”한다고 입장을 밝힌 게 논의의 전부였다.
19대 국회에서도 가사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이 두 차례 발의됐다. 김춘진 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2013년과 2016년에 발의했다. 근로기준법상 가사 사용인 제외조항은 유지하되 가사노동자의 노동조건 기준을 확립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식이었다. 김 전 의원안은 최저임금·휴게시간 보장과 4대 보험 가입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인영 의원안은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을 육성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두 법안 모두 환노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의원안과 정부안 3건이 발의됐다. 서형수 더불어민주당 의원(2017년 6월), 이정미 정의당 의원(2017년 9월), 정부(2017년 12월)가 관련 법을 발의했다.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이 가사노동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사용자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내용이 모두 들어갔다. 두드러진 차이는 주 15시간 의무 규정이다. 이정미 의원안에는 “주 15시간 이상의 근로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정부안은 “최소근로시간은 주 15시간 이상이어야 한다”면서도 “다만 가사노동자의 명시적 의사가 있는 경우 또는 경영상 불가피한 경우 주 15시간 미만으로 정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을 넘어야 유급휴일과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법이 발의된 지 2년 가까이 흐른 지난해 3월에서야 환노위 고용노동소위에 상정됐다. 논의가 조금이나마 이뤄졌지만 3개 법안을 종합해 수정의견을 살피는 수준이었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번번이 가사노동자 보호법안이 폐기되는 것에 대해 “가사노동을 주요 의제로 다루지 않고 ‘사소한 문제’ 로 취급하는 의사결정자들의 인식이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노동부는 지난 19일, 같은 내용의 법안을 입법예고해 21대 국회에서 1호 법안으로 통과될지 주목된다. 노동부 고용문화개선정책과 관계자는 “21대 국회 통과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으나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만큼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5만명 중 8만명 플랫폼으로 편입 덴마크 플랫폼 기업 최초 단협 체결, 미국 이동형 복지 실험
문제는 노동부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데 있다. 단순히 법안 통과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플랫폼 산업 성장에 따른 시장의 변화를 고려해 가사노동자 보호를 위한 포괄적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알선받는 기존 방식에 더해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해 고객과 연결되는 형태로 고용방식이 다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발표한 ‘플랫폼 경제종사자 규모 추정과 특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플랫폼 노동자는 46만9천~53만8천명이고, 이 중 가사·육아도우미는 8만1천~9만3천명 수준이다. 노동부가 추산한 25만명을 기준으로 하면 가사노동자 3명 중 1명꼴로 플랫폼 시장에 편입되고 있는 셈이다.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할 만한 제도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플랫폼으로 급격히 편입될 경우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플랫폼 업체는 최소 4시간이 필요한 노동을 한두 시간 단위로 쪼개기 한다”며 “짧은 시간 내 일을 압축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는 세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플랫폼 노동 안에서 가사노동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장희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객원연구원은 “배달노동자의 경우 정확한 시간에 물품을 전달하면 되는 거지만 가사노동은 서비스 특성상 서비스 질을 평가하기 어렵다”며 “때문에 가사서비스 업체가 매뉴얼을 준다거나 교육을 직접 시킨다거나 하는 사용 종속성 문제가 더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2년간 가사노동자로 일한 B(57)씨도 “현장에 막상 나가면 ‘베란다만 (청소)해 주세요’ ‘안방 화장실만 해 주세요’ 이런 요구를 하는데 실상 시키는 일만 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외국에서도 플랫폼에 편입된 가사노동자의 노동권 보호를 위한 대안 모색에 나서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플랫폼 노동 논의와 실태, 정책과제 모색’ 포럼 자료집에 따르면 덴마크 가사서비스 플랫폼기업 ‘힐퍼(Hilfr)’는 2018년 플랫폼기업 최초로 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기존처럼 일하는 ‘프리랜스 힐퍼’와 단협을 적용받는 ‘수페르 힐퍼’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수페르 힐퍼는 최저임금·유급휴가·실업급여를 적용받는다.
전미가사노동자연맹은 2018년 ‘이동형 복지(portable benefits)’라는 새로운 사회보장제도를 시범도입했다. 여러 일터를 옮겨다니는 특성을 고려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이용자를 일종의 사용자로 간주하고 고객이 사회보험료(거래당 5달러)를 납부하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외국 사례를 한국에 단계적으로 적용하자고 권한다. 이상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원은 “가사노동자 대부분 스스로 노동자라는 인식이 아직까지 넓게 형성돼 있지 않아서 노조를 설립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국내에서 현실화하기 어렵다”며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법적 토대부터 만들고 사회안전망 논의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고은 ag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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